세상 속에서 은둔하기 / 김지현
- 추천 책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바다출판사, 2021
(발췌는 쪽번호로만 표기)
 
햇살이 환한 아침, 몸을 폭 감싸는 안락의자에 앉아 따뜻하게 우린 차와 크로아상을 한입 물고 책을 펼쳐 든다. 약간의 잡음이 섞인 라디오에서는 밝고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오늘은 아무런 약속도, 밖으로 나가는 일정도 없다.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책의 문장을 읽는다.
 
“이때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단순한 사실적 진술 하나가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그 말을 듣는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p.40
 
내게 너무 완벽한 문장이다.
 
2019년, 내 삶은 큰 전환을 맞았다. 평생 부산 북구의 한 동네에서 살고 있던 나는 20대의 마지막을 맞아 훌쩍 지구 반대편으로 떠났다. 독립출판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 짧은 시간에 삶이 크게 달라지고 있던 때였다. 세상에 처음으로 내 글을 내보였고, 내 글의 독자가 생겼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많은 자리들을 만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상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삶의 빛을 찾은 느낌이었고 그 빛을 향해 정말 열심히 달렸다. 그 환희만큼 이면에는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쩐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심정. 그때는 그 마음이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영문도 모른 채 즐거운 자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졌다. 그 어느 때보다 내 삶이 반짝이고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내면의 어둠과 납득할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덴마크행은 정말이지 돌발적으로 결정됐다. 우연히 우프(WWOOF)라는 국제 프로그램과 덴마크에 있는 매력적인 마을을 알게 됐다.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워킹홀리데이처럼 타국에서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외국에서 살아볼 수 있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니, 실은 그 모든 이유(매력적인 마을, 외국에서 살아보기, 복지국가 덴마크에 대한 환상 등)는 일단 ‘떠남’을 단숨에 마음 먹은 뒤 하나씩 갖다 붙인 설명 가능한 이유들이었다. 저 먼 곳으로 떠난다는 이미지-지금 여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은 마치 구세주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덴마크 마을 공동체와 우프에 관해 알게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덴마크로 떠날 모든 준비를 시작했다.

덴마크에서의 시간은 여러 의미에서 나를 변화시켰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나의 삶과 내가 평생 살아온 사회를 새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되었으며 더 나은 삶의 모양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 모든 배움과 함께, 덴마크 이후로 나는 마치 처음처럼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언어적 고립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나를 ‘혼자’로 자각하게 만들었고, 여가 시간을 충분히 누리는 문화 속에서 이전까지 느껴본 적 없는 안락함에 푹 빠졌다. 덴마크에서 나는 지극히 ‘나’로 큰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덴마크에서 발견한 ‘나’를 천천히 긍정해가고 있다.
 
“나는, 홀로 걸어가며 속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나는,
‘우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외톨이 은둔자다.” p.44
 
덴마크에서의 생활기를 담은 에세이집 <덴마크 우핑 일기>(네시오십분, 2021)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을 많이 했다.” 독립출판으로 삶의 환희를 맛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일상의 테두리가 확장되고, 무엇보다 그토록 바라던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생활을 시작했던 그때 내가 느꼈던 우울과 허무는 ‘소진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열렬하게 온 마음을 다하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몽땅 털어 다양한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때의 나는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활발한 관계망 속에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적 학습은 내 속에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늘 관계에 실패하면서도 그 믿음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가치 있는 삶의 지표는 ‘누군가’들의 좋은 시선과 평가에 의해, 나를 지지해주고 애정을 주는 타인들로부터 형성되는 것 같은 신화는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친구가 적은 쪽보다는 많은 쪽이, 늘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쉴 새 없이 누군가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약속이 생기는 쪽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고 나도 늘 그 속에 있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응원해주는 좋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하던 일을 열심히 꾸려가며 조금씩 소진되던 그 시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와 새로운 일상을 보내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주 오랫동안 이 고요의 시간을, 고립의 장소를 바라왔다는 사실을.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에너지 넘치는 멋진 관계보다도 오롯이 혼자가 되는 고독의 시간이라는 것을.

캐럴라인 냅의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찾아온 내 삶의 처방이 괜찮은 삶의 한 방식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더불어 어떤 통쾌함과 진한 위로를 받는다. 그의 글쓰기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글쓰기다. 과장하지 않고, 교훈을 찾지 않고, 손쉽게 사회적 학습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의 쓰기는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그대로의 스스로를 긍정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글쓰기 안에서는 오랫동안 삶에 드리운 사회적 신화가 해체된다. 지독하게 학습되어 온 교훈적 삶의 태도가 얼마나 신화스러운 것인지 드러난다. 이웃과의 활발한 교류, 끈끈하고 신뢰가 두터운 우정, 하나의 세계로 교합하는 완벽한 사랑이란 얼마나 강력한 허구인지. 아무것에도 중독되지 않고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사와 일상 패턴이 있는 삶이란 얼마나 영화 같은지. ‘날 것의 나’는 이웃의 시선과 관심 따위 실은 신경쓰고 싶지 않고, 끈끈한 우정이란 생각보다 자주 끔찍한 배신으로 경험되며, 완벽하게 일치되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늘 관계를 망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환상들을 ‘옳은’ 것으로 끈질기게 믿는다. 혼자로 만족하는 삶에 늘 변명을 준비한다. 타인을 이해해보려는 그 숱한 시도만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왜 늘 손쉽게 지워지는가. 적당한 고립과 열렬한 고독은 빛나는 우정과 사랑만큼이나 누군가의 삶을 구원한다.
 
그의 고립이 이상한 위로가 되는 건 그가 결코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면서 은둔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은둔자가 된다. 그는 철저히 혼자이고 동시에 함께다. 그에겐 글쓰기가 있으므로. 그에겐 가감 없이 스스로를 마주하고 타인과 관계와 세상을 탐구하는 도구가 있으므로 명랑한 은둔자가 된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과 세상이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내 눈엔 그가 그 누구보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가장 수평에 가까운 균형을 이루어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힘을 쏟는 만큼 자기 자신이 되는 시간에는 생각보다 정성을 들이지 않으니까. 글쓰기는 안전하게 고립되고 명랑하게 은둔하며 타인과 연결시켜주는 통로다. 운명처럼 기적처럼 내 삶엔 글쓰기가 있고, 나는 그로 인해 두려움 없이 온 힘을 다해 세상 속에서 은둔할 것이다.